세상 모든 비루한 것들에게 바침

정형탁 | 계간 컨템포러리아트 저널 편집장

   1959년 한반도 전라도 함평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남. 1965년 산업화에 의한 이농. 가족 모두 광주로 이주 1966-71년 광주 수창 초등학교. 의리는 있으나 주의가 산만하고 난폭함이란 기록을 생활기록부에 남김. 문제아 칭호를 획득했으나 개의치 않음. 미술에 소질을 보임. 1972년 광주 북성 중학교. 담배를 시작함. 싸움에 재미를 붙였는데 이는 마아도 싸움을 자기 존재의 확인 기재로 생각했던 거 같음. 스스로 못생긴 외모를 인식함. 1973-77년 광주대동고등학교. 그림의 재미를 알고 미술반 활동. 성적은 꼴찌. 1978-1981년 대학 낙방 후 삼수. 유치환의 시 <생명의 서>를 암송하고니 체와 반야심경에 몰두함. 철학적 싸움꾼이 되고자 함.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발발. 공수부대에 연행 구금. 선량한 인간이 조직 에 의하여 야수가 되는 현장을 목격하였고 만신창이로 구타당함. 거대 조직의 폭력성에 눈을 뜸. (5·18 민주화유공자 포상. )스스로 지향해야 할 가치의 정체에 대하여 깊은 고뇌가 시작됨. 1981년 “혼돈”속에서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입학 후 군 입대. “북도 아니고 남도 아니다”라고 선언한 후 총기난동, 구속 후 정신병원 6개월 수감. 숨쉬기도 귀찮은 극적단 우울증 상태 체험. 1983-87 대학 생활. 대학에서 요구한 정신 감정 결과 normal 판정 받음. 정신 감정서를 복사하여 주위에 돌렸는데 오히려 진짜 정신병자 취급 받음. 천문과 지리에 관심을 가지고 천하를 주유하며 독서에 몰두함. 학점은 별로 안 았좋으나 졸업시 촉망받는 신예작가로 인정 받음. 1988-89년 마당극단 대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제3권 나왔을 때 마당극단 창단 기념 공연으로 올림. 조정래와 임헌영으로부터 찬조금 받음. 대도 조세형과 “무전유죄”를 외치며 자살한 지광헌의 얘기를 <유전무죄 무전유죄> 라는 제목의 풍자 마당극으로 만들어 제2회 공연으로 올림. 1989년 미술교사 따분하게 느껴져 6개월 만에 사표 제출. 1990-2002년 건설, 식당, 인터넷 그리고 병원 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함. 성형외과와 인터넷 광고 업체를 경영 하던 중 의료광고 위반으로 의사협회와의 소송관계에 휘말림. 재판 중 검사와 판사에게 욕하다 법정 구속 됨. 구속 된후 해당 사업을 접어야 했고 경제적 파산. 2006년 북경 환티에에 작업 공간 마련하고 중국에서 활동.

‘아가리로 주절대나 똥구멍으로 말하는‘ 듯 산업폐기물을 토하는 여자 조각상들이나 ‘모가지를 뽑아 똥장군 마개로 할 놈’에게 자신의 오장육부를 드러내는 심업의 조각상은, 그러니까 어떤 구체적 타자를 상상하게 만든다. 하나의 상황극처럼 혹은 네 칸짜리 만화의 말풍선처럼 조각은 가득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꽉 차 있다. 욕이 비벼져 있는 듯 그의 조상각은 언뜻 미켈란젤로나 로댕의 덩어리감을 느끼게도 하지만 자코메티의 팔다리가 긴 슬픈 현대인의 초상과도 닮았다. 아니 사실 무엇보다도 조각상은 평소 잘 쓰는 심업의 입말 속 욕설들과 닮았다. 그래서 조각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그것이 설욕이든 뭐든, 가득 품고 있어 보인다. 그는 무엇을, 또 누구를 향해 울부짖는가.

  심업이 중국을 간 건 2005년도 가을이다. 작가 스스로 말하듯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국내 정치적 상과황 한 개인의 어긋난 여정 정도만 말해두자. 그가 첫 작업실을 얻은 곳은 공장지대인 798 예술구 옆 철도 기지국이었던환 티에라는 곳으로 대형 작업들이 가능한 곳이다. 현재는 송장(宋庄)이라는 단조공장과 동 제조 공장이 많은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처음 이곳에서 첫 개인전을 여는 2008년 여름 동안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작품들은 대부분 인체(군상)이다. <창천(蒼天)>이라는 전시 제목을 붙인 첫 개인전에서 그가 선보인 인체군상은 미국의 힘으로 해석되는 M16소총이심 장에 박힌 인물, 꼬부라진 자유의 여신의 음부에서 탄생된 여러 인체 군상시리즈, 남녀가 부둥키고 얽혀 상승하는 인체군상 등이었다.

  조각하면 으레 인체조각이 떠오르듯 오랜 동안 조각가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누드건 옷을 입었건 인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거다. 심업 역시 모두 인체 조각이다. 아마 조각가의 열의 아홉은 이 주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이 것다. 수세기에 걸쳐 인체를 표현한 조각 작품은 특정한 사건의 서술, 감정, 고양과 욕망뿐만 아니라 추상적 개념들까지도 표현해 내는 소재다. 조각사에서 인체라는 고유한 형태, 이상적인 형태라는 중심적인 주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196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조각이 등장할 때였다. 이는 또한 미국과 러시아에서 핵미사일 개발이 확장되어 세계 긴장이 고조되던 냉전 시기이기도 하다. 심업의 M16과 AK47은 미국의 폭력과 소련과 동유럽의 패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각사에서 핵전쟁, 전지구적 테러, 섹슈얼리티, 욕망, 정체성, 질병과 성차별, 동성애 등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형상 조각은, 특히 인물형상조각은 강력한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물론 이는 서양현대조 각에 한해서다. 국내에서 이러한 인물형상조각을 통한 정치와 삶의 재현을 구현한 작가는, 필자의 지식 안에선, 구본주 이후 거의 없는 듯하다. 인체형상조각은 자칫 오래된 주제만큼이나 진부한 소재로 해석될 우려가 있는 탓이다

  그래서 늘 단독의 인체형상조각은 재창조되었더라도 늘 외양은 딱딱하고 성직자처럼 굳어 보일 수 있으며 또한 인체군상조각은 거대한 기념이거나 관념적이고 집단적인 추모를 형상하는 듯 보일 위험이 늘 있다. 1980년대 현대조각에서 인체의 절단이나 아브젝시옹(abjection, 1982년 『공포의 권력-아브젝시옹에 대한 에세이』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초현실주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에게서 가져 온 심리학적 개념으로 몸의 개인적이고 친근한 양상을 제거하려는 욕망은), 그것이 포스트모던적인 표현주의적 양상으로 해석되기도 한 반면, 인체형상조각이라는 장르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1993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있었던 <오브젝 아트: 아메리카 아트의 증오와 욕망>에서 루이스 브루조아, 키 스미스, 로버트 고버가 보여주는 인체조각들은 모두 상처입고 부상당한 형상을 하고 있다. 형상 인체 조각의 한계를 선언한 셈일지도 모른다.

  심업의 이번 인체형상조각은 오히려 그런 진부함이라는 수식 내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그의 인체형상은 어쩌면 이 렇듯 한계에 다다른 현대미술, 현대조각사에서 인체형상조각을 새롭게 표현해내는 데 있다. 전통 조각이 가진 매스와 덩어 리, 길고 가느다란 팔 다리, 과장된 표정과 정치적인 메시지의 혼합은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새로운 건 그가 소재를 다루는방식이나 메시지에 있다.

  심업의 인물형상조각은 서구문명, 특히 미국의 힘의 정치와 소비주의적 문화에 대한 엄연한 경고의 언어다. 확연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가 오장육부를 뒤집고 외치는 ‘조까’는 명확히 서구라는 타자를 상정한다. 명확하고 단순한 이러한정체성 게임은 오히려, 이제야 의미를 획득한다고 필자는 본다. 왜냐하면 국내조각의 현실에서 보자면 이러한 직설적 언어를 인체형상으로 드러낸 작가는 없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거처를 물을 때 내부지향적 시선에 머무는 것이 국내화단의최근 풍토다. 심업은 그렇지 않다.

  그의 작품은 더러운 타자를 상정한다. 성조기와 자유여신상으로 상정되는 미국, 혹은 초국가적 자본을 타자로 내세운다. 물론 이러한 더러운 타자는 순수한 타자를 상정한 것이기도 하다. 흔히 초기 거울 단계에서 유아와 그 보호자가 적절한 리거를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순수한 타자 혹은 주체에 대한 시선은 언제든 더러운 타자에 대한 반동적인 시선으로 넘어 갈수 있다. 그것은 전체주의적이며 폭력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서구 문명과 학자들은 적절한 거리, 즉 주체와 자타의 적절한 거리, 예술로 치자면 우아한 상징이나 패러디라는 완충지대를 늘 염두한다

  그러나 심업은 이를 모두 내팽개친다. 마치 프랑스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알제리의 한 지식인으로서 프란츠 파농이 올바른 간격, 거리란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라고 말하고, 한번도 보편적인 인간에 대해 말한 적 없는 유럽 식민 국가들의 ‘설외적인 나르시시즘’과 결별하고자 고민했던 것처럼, 심업의 언어는 과감하게 고유한 식민 국가의, 동아시아적 언어를 제1세계의 타자들에게 쏟아 붓는다. 이러한 대화의 방식은 위험하고 철지난 듯 보이지만 소중하다. 왜냐하면 결국 더러운 타자, 아픈 타자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나에 대한,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로 회귀해서 돌아오기 때문이다

  타자는 사그라지는 시점에서 다시 복귀한다. 타자가 외부에 있다는 모던적 이성이 상실되었다는 건 동양 고전은 물론이 고 서구의 현대철학에서 이미 누누이 강조된 지점이다. 데리다의 서구 로고스중심주의를 ‘방해하는’ 중국의 서예, 푸코에게서 서구적인 사물들의 질서를 혼란케 하는 중국식 백과사전, 대안적 동일시들로 크리스테바를 유혹하는 중국의 여성들이 그 예다. 이렇듯 현대의 구조주의자들이나 철학자들이 주체를 타자에 대립시키는 것에 대한 해체나 구조적 논의가 활발했던 반면, 예술, 특히 국내 조각에서 이러한 주체의 구성을 타자에 외삽시키는 어떤 조형적 언어들을 필자는 알지 못한다. 심업은 이제껏 한국현대조각이 못한 서구에 대한 올바른 거리를 갖는 방식을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국내의 조각계와 제국의 자본을 동시에 내파한다. 그의 직설적 메시지는 사실 우리 것이기 이전에 서구의 것이었고 이제는 우리 모두의 것인 셈이다

그의 조각에서 철이 갖는 질감과 덩어리의 힘은 시각적으로 압도적이다. 허나 사실 그건 폴리 위에 입힌 쇳물, 쇳루가다. 물론 실제 청동이나 철인 작품도 없지 않으나 많은 작품들이 이렇듯 소재의 진중함을 초월한다. 소재적 측면에서 이번 전에시서 보여지는 일명 ‘뽁뽁이’, 즉 에어캡 인물형상은 바로 이런 소재의 초월적 측면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셈이다

   뽁뽁이는 어쩌면 버려진 사물이다. 비루하거나 소외된 소재다. 전 지구적으로 옮겨 다니며 쓰이는 포장의 도구다. 도 구에게 탄생, 즉 본성(nature)이란 없다. 본성은 태어남(Nature)을 뜻하며 이는 자연적이며 생래적인 것이다. 하지만 도구들은 그저 만들어질 뿐이다. 도구들은 ‘그냥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식용 돼지나, 실험실 쥐들은 태어나지 않는다. 들그은 인간에게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공업용 사물에까지 이러한 감정의 이입은 물론 인간의 피상적 감상일 것이지만 과연 그것 이 인간의 감수성에 한해서만 사유되어지는 것들일까? 전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이 도구들, 수단들이 역습하는 온갖 징후들을 보라. 최초 핵실험 이후 지구상에서 암 발병 환자는 급속하게 증가했다. 유전자를 변형하고 조작하는 식품의 폐해는 아직 그 결을말 알지 못하며 수단으로 사용되는 모든 것들이 토양과 공기를 오염시키는 예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뽁뽁이는 가치 있는 것들을 싸는 도구다. 여기서 가치는 물론 자본의 가치다. 뽁뽁이는 이러한 자본의 가치, 즉 환교의 가치에서 벗어난 존재자다. 쓰레기인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포장’이라는 개념 속에서 자본에 소속된 것들이기도 하다. 이들 없이 보석은, 작품은, 냉장고는, 아이폰은 유통되지 못한다. 이들은 자본의 논리에 소속되어 있는 집합이지만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배제된 가치들’이다. 익명의 분자인 셈이다. 집합에 속해 있지만 배제된 마,치 공동체 안에서 배제된 어떤 소수자들이 연상되지 않는가. 집단 속에 속해 있으나 쉽게 배제되는, ‘덩어리’(mas)지s 만 ‘주민’(population)은 아닌 존재 말이다. 뽁뽁이는 거창하게 유비하자면, ‘상황의 부분에 포함되지만 그 부분에서 벗어나 있는 자’인 셈이다.

  화려한 조명이 뽁뽁이 내부에서 휘황하게 발화하는 작품은 이전 청동이나 폴리 인체조각의 새로운 시도다. 가령 내부 조명으로 인해 포장되는-이는 포장지가 조명으로 재포장되는 상황이다-조각은 일순간 암전 상황에서 처참한 몰골을 드러낸다. 한 땀 한 땀 뜬 꿴 실과 자국들, 거칠고 더러운 포장지의 겉피가 관객에게 일순간 고스란히 드러난다굳.이 이를 현대사회나 도시인의 내면, 자본의 환타지로 읽을 필요는 없더라도 뽁뽁이의 존재 자체를 문명의 속살로 재전유하는 방식으로서 훌륭하다. 뽁뽁이 인체조각은 자본에 속해 있으면서도 셈해지지 않는 세상의 모든 비루한 존재자들에게 바치는 애가로 읽어도 되고, 그 어떤 타자-자본주의, 서구 문명, 전쟁과 테러 등-를 상정하고 그것에 대한 해방과 탈출 의표현처럼 읽어도 무방할 테다.

그의 조각이 갖는 힘은 탈조각적 소재의 차원이나 전통 조각의 기법 등에서 찾는 것보다 오히려 조각 자체가 갖고는 있 원형적인 무엇을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그 원형적인 무엇을 우린 알지 못하고 규정할 필요도 없지만 최근 국내 조계각의 여러 상황에서 모처럼 힘있는 작품을 만났다는 건 여러모로 설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