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업, 그 반시대적 탈주의 빛, 그리고 진실

윤동희 | 영상 커뮤니케이션, 북노마드 대표

   널리 퍼져 있는 통념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에서 살고 있다. 20세기가 ‘결핍의 시대’자이 ‘규율 사회’였다면 21세기는 ‘과잉의 시대’이자 ‘성과 사회’라는 한 철학자의 정언에 모두들 공감하고 있다.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에 순응하는 이들만이 승전가를 부르는 시대에서 현대인은 그저 노동만 하는 인간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세상과 인간의 보폭은 결코 같지 않아서, 언젠가부터 세상은 너무 빨리 걸어갔고, 인간은 그 뒤 를쫓느라 분주히 발을 놀려야 했다. 한편으로는 절망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미는 그 어긋남 속에서 인간은 ‘하지마 라’는 명령에 순종하다가, ‘할 수 있어’라는 감언이설에 기만당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눈앞에 와 있는 국파을 알아차렸다. 때는 이미 늦었다. 세상은 늘 그렇듯이 인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1959년에 태어나 2006년부터 중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심업의 고민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전 지구적 경제와 시장의 규칙이라는 이름의 물질적 진보가 도덕적, 정신적 가치들을 압도하는 시 대. 심업의 미학적 사유는 이런 생각 앞에서 서성거린다. 물리적 연대기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작가는 1987년 미술대학 졸업 후 적지 않은 시간을 미술의 ‘바깥’에 머물렀다. 때론 가급적 미술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때론 그 경계 위에서 많 은것을 보았고, 많은 얘기를 들었고, 많은 곳을 다녔던 시간이었다. 부귀영화와 희로애락을 모두 맛본 풍찬노숙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생을 절박하게 탕진한 결과 그는 알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시공간의 다른 이름, 살아 있는 한 돌아와 하야는 곳. 심업에게 미술이란 그런 곳이었다.

  아주 오랜만의 복귀는 생각보다 더디지 않았다. 미술의 외부에서 몸으로 체득한 인문학적 성찰이 일등공신이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도구화와 인간 소외 문제의 근본 원인을 인간과 존재가 맺는 근원적 관계에서 찾은 하이데거식 입장이그 의 작업의 출발점이 되어주었다. 기술은 인간과 존재가 강제적인 ‘몰아세움’의 관계를 맺도록 만들고, 이 때문에 존재자체는 철저하게 망각된다는 쉽지 않은 명제를 그는 능숙하게 구현하였다. 미술의 운동성이 부정되는 현실, 예술가의 열정이그 쇠락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에게 심업이라는 바람은 잔잔한 파문을 불러왔다. 어느덧 우리의 시야에심 업의 옹골차면서도 해학적인 작업이 들어왔다. 심업의 작업이 눈에 띄었던 것은, 오직 그만이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를 온몸 으로 막아 세웠기 때문이다. 물질적 발전을 우선시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정신적 가치들이 매장되고, 우리를 사로잡는 가공할 기술이 정작 우리의 가치와 문화와는 단절된 현실에서 ‘결국, 미술’을 선택한 심업의 생각은 하나의 표상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심업의 작업이 반가운 이유는 표현과 주제, 메시지가 편안하게 묶여진 얌전한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는 작금의 미술계에 서 모처럼 힘 있는 작품을 만났다는 데 있다. ‘감각의 리비도’, 즉 감각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출발한 작품과의 오랜만의 해후였기 때문이다. 그의 첫 개인전(2008년 7월, 베이징 챵 미술관)은 한마디로 폭발적이었다. 거칠면서도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대륙을 움직였다.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의 작품이 있다고 한다. 외관이 우악스럽지만 에너지가 결여된 작품이있 고, 고요한 듯 평온하지만 뭔가를 자극시키는 작품이 있다. 조형 원리에 충실하지만 생각이 결여된 작품이 있고, 재기는넘 치나 미술의 어법을 무시하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심업의 작품은 이와 달라서, 보는 이를 소외시키지 않는 명쾌한 조형언 어에 혼신의 기(氣)를 담고, 조각의 근본을 찾는 손맛에 서양문명의 허장성세를 압도하는 개념을 장착했다. 아름다움을 위해 그 아름다움을 죽일 수 있는 용기백배, 미(美)와 추(醜)를 아우르는 자신만의 탐미주의. 심업의 작품은 동서양의 조화를 얘기하는 얼버무림 대신,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의 ‘생살’을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강단을 지녔다. 존재(eBing)를 철학적 탐구의 정점에 놓는 서구 문화와 무(無)의 체득을 정점에 놓는 동양 문화의 경계에서 자유롭게 자족하는 아름다움. 심업의예 술 영토는 이처럼 광대하다.

  작품에 깃든 생각도 시의적절하다.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가 득세하는 상황에서 자유시장이 자유로운 사회를 보장하는가 라, 는 질문이 던져지던 무렵이었다. 생각 있는 이라면 누구나 미국식 슈퍼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때였다. 현대인의정 체성이 ‘시민’에서 ‘소비자 및 투자자’로 변하고, 전 지구적 경쟁과 혁신을 내세운 기업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 었다. 모두가 잘 사는 것 같은 착시 속에서 시민공동체가 애지중지하던 가치들은 속절없이 붕괴되었다. 부를 독점한 극소수를 제외한 거 의 모든 사람들이 생계를 꾸려가는 것과 삶을 꾸려가는 것에 지쳐가고 있었다. ‘슈퍼자본주의’ 아래 지구촌에 ‘부유한 노예가’ 넘쳐나고 있을 때, 심업은 자본주의의 오르가즘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개인의 피폐한 삶을 예견했다. 가족이 붕괴하고, 지역 사회가 분화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생계를 위한 일에 바쳐야 생존이 가능한 시대에 단순히 ‘느리게 살자’라는 도덕적인 가르 침으로는 문제의 근원을 발본색원할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정치적, 경제적 인간에서 문화적 인간으로! 지구를 위한 로새운 규칙에 뿌려야 하는 거름은 바로 ‘문화’라는 낭만적 혁명임을 선포했다. 때마침, 어쩌면 다행히 미국 경제가 고꾸라졌다자. 유의 여신상, 달러와 미군 병사의 이미지, 그 속에서 저항하고 몸부림치는 민중의 이미지……. 유럽을 거쳐 미국에서 고착된 서양문 명의 역사적 한계를 본능적으로 체감한 그의 사유의 뼈대에 운동성이라는 근육이 견고하게 달라붙는 순간이었다.

  심업의 첫 번째 전시가 서양문명의 죽음에 가까이 가 있다면 두 번째 전시(2011년 11월, 갤러리TN)는 동양문 명의 재생에 닿아 있다. 그는 끊임없이 쇄신하는 변형의 원칙 아래 시험과 해체를 몰고 다녔다. 달큰한 현대미술에 길들여진 우에리게 얼핏 변종(變種)으로 다가오는 그의 작업은 스펙터클의 폭력을 일삼는 서양문명과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낭만을 예술적 아우라로 오인한 채 지켜지지 않는 진부한 약속을 남발하는 작금의 미술계를 그는 혐오했다. 미술의 바깥에서 생의 부대분을 자본주의에 헌납한 그가 지천명을 앞둔 나이에 거둔 성과는 ‘반자본주의’ 또는 ‘탈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라는 나무 아래에서 인간이라는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는 현실을 지켜본 그의 확고부동한 깨달음에 세상은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인간이란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였다.

  심업의 작품에는 걸걸한 목소리와 강한 몸짓이 느껴진다. 한눈에 매혹되는 것은 정통적인 조각의 이미지이지만, 그 이미지들을 눈으로 어루만지다보면 마뜩찮은 세상을 향한 걸쭉한 욕지거리가 들려온다. 역동적으로 꿈틀거리는 신체가 최초의 이미지라면 지리멸렬한 삶의 상투성을 꾸짖는 ‘욕설’은 그의 작품을 완성시키는 최후의 이미지이다. 본디 욕이란 파안대소를 불러일으키는 해학의 전형이었다. 우리의 욕은 전천후였다.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몇 마디 욕설만으로 생생한 삶의 풍경을 만질 수 있었다. 우스개로 치부하다가도 이렇게 속 시원하고 속 깊은 사색이 없다. 심업의 작이업 그렇다.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고 중국 대륙을 향해 일갈하는 그의 ‘욕’은 무모하리만큼 완강한 자신감이 넘친다. 조각이라는이 름의 ‘살(育)’에서 폭력을 잉태하는 서양문명을 준엄하게 꾸짖는 직접적이고 확실한 욕설이 그의 이름을 우리의 마음에 등록시켰다. 심업은 자신의 삶의 경험과 통찰로 예술을 밀어붙인다. 그 인문학적 성찰로 반성을 요구하고, 책임을 추궁한다(要求反 省 追究 責任). 그 시작과 끝에 욕이 있다. 동세대 작가들과 그의 차이는 바로 이 경험과 깨달음에서 생겨났다. 아름다움 을위한 작업이 아닌, 가장 자신다운 작업이어서 아름다운 작업. 이렇게 대책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작업에 하루하루 이저리리 눈치 보며 살아가는 우리는 통쾌할 수밖에.

부도덕한 세상을 향한 불온한 아름다움

  서울에서의 이번 전시는 심업이라는 작가가 지금 어디로 가려 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으로 회자될 듯하다. 실로오 랜만에 우리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진, 힘 있고 당당한 작가의 외침을 듣게 되었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재료의 미학 을눈으로 만질 수 있다는 것도 마음을 동하게 한다. 리얼리즘의 계보를 잇는다고 평해도 무방한 ‘진실’한 조각에 일명 ‘뽁이뽁’라 불리는 새로운 재료가 작가의 개인적인 어휘로 등장했다. 적당히 키치적이고, 적당히 모더니즘적이고, 적당히 탐미적이고, 적당히 음탕한 그의 신작은 묘하게 우리의 눈길을 잡아당긴다. 미술에 응당 따라붙는 내면의 깊이를 허위로 치부하는 이상한울 림이 ‘뽁뽁이 여인’에게서 느껴진다.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예술적 평형감각. 고급스러운 재료와 정통의 우아함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심미적일 수 있음을 심업의 자유분방함은 보여준다. 예술이 더 이상 예술로 남을 수 없는시 대, 철학이 더 이상 철학으로 남을 수 없는 시대에 심업은 그 둘 사이의 궁극의 지점을 찾으려 한다. 형형색색의 자본의주의 달콤함과 그 속에 내재된 어둠을 밝히는 그의 사유와 감각이 이를 가능케 한다. 개인의 욕망과 욕망이 점철된, 그하리여 자본주의 자신조차 그 끝을 알 수 없는 시대의 초상을 구현하기 위해 그는 공기 중에 존재하지 않는 ‘빛의 미학 ’끌을어들였다. 이 빛이 이번 전시의, 아니 그의 최근 변화의 핵심이다. 그 빛들의 깜박거림이 우리를 끌어들인다. 어떤 색깔이라 는단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작가가 만들어낸 ‘19금(禁)’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빛의 스펙트럼이 우리가 지금 어디에존 재하는지 말해준다. 세상에 대해, 물질에 대해, 욕망에 대해 터무니없는 희망 혹은 절망을 품고 있는 ‘우리’를 향한 이미.지 중국에서 잉태해 서울에서 발한 심업의 불온한 ‘빛’은 그래서 창조적이다.

  그야말로 ‘미친’ 세상이다. 그건 미술도 마찬가지여서, 미술시장의 흥망성쇠에 모든 것을 내맡긴 이 미친 미술계에서 뜨거운 냉철함과 치열한 관조라는 양립 불가능한 가치를 한 몸에 지닌 작가 심업의 존재는 우리를 울컥하게 한다. 머리는 되있 몸은 없는, 몸은 움직이되 머리는 생각하지 않는 현대적 감수성을 자랑하는 작가들과의 ‘차이’는 그래서 도드라진다. 심업의 작업에 희망을 거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희망을 부르짖지 않기 때문이다. 대책 없는 희망과 지조 없는 타협 대신 안대 있는 욕설을 퍼붓는 그의 태도가 믿음직스러운 까닭이다. 누가 그랬던가. 미학적 파탄을 가져오기 쉬운, 어딘가 타협의 냄 새가 나는 희망을 말하는 예술에 마음을 내어준 적이 별로 없다고. 만약 그의 말이 전적으로 맞는다면, 심업의 예술은절 “망을 희망으로!”라는 정치적 구호로 휘발되지 않기에 희망적이리라. 절대적으로 미쳐서 돌아가는 세상에 절망하고 탄식하는 작업, 나(I, me, my, mine)를 넘어 너와 우리를 돌아보는 작업, 동서양의 미학을 관류하는 작업, 언젠가부터 의미 없어진 ‘당대(contemporary)’를 뛰어넘는 근원적인 자유로움이 그득하기에 아름다우리라. 나는 믿는다. 작가와 작업이란 ‘네가 죽으면 나도 죽겠다’라는 시어(詩語)처럼 애정의 파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그 병적인 애정 속에서 서로의 오지와 극지를 넘나드는 예술가와 그 결과물을 기다리고 갈망한다. 그 자유로운 탈주 속에서 진실은 탄생한다고 믿는 나에게심 업은 절망을 노래하는 치명적인 예술가이다. 그는 ‘진실한’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