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천”—심업 현대조각예술 토론회

 2008년 7월 2일 오후
칭화대학교 미대 평생교육학원
저우 웨진

저우 웨진
“창천蒼天”-심업 현대조각예술 토론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토론회에 참석하신 비평가와 전시 관계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비평가 쟈팡저우 선생님, 중국예술비평사이트 주필이십니다. 위딩 교수님, 중앙미술학원 인문대 부원장으로 계십니다. 가오링 박사, 미술비평가로 활동 중이십니다. 인솽시 박사, 중앙미술학원 <미술연구> 의 부주필이며, 중국조소연구센터 주임이십니다. 양웨이, 미술비평가이고, 숭좡예술촉진회 예술 총감독을 역임하고 계십니다. 덩핑샹선생은 저명한 미술 비평가이시고, 최진석 교수님은 한국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시며, 예술가 심업의 절친한 친구이십니다.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고, 한국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영어에도 능통하십니다. 조정무, 이번 전시의 보조 큐레이터이자 심업 선생의 동료입니다. 조선족이며, 한국에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숭좡에서 작업중인 작가입니다.

먼저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된 동기부터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략 일 년 반쯤 전에 작가 최헌기씨가 한국의 훌륭한 조각가 한 분이 베이징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가서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을 접하는 순간 저는 심업이라는 이 한국 조각가가 뛰어난 현대 조각가라 생각하여 전시회 기획을 약속했습니다. 오늘 전시된 작품은 최근 2년여 동안 창작된 것들입니다. 처음에 심업씨는 <하늘-天>을 작품의 테마로 삼았는데, 제가 <창蒼>자 하나를 더 붙이자고 하니까 그도 좋다고 하여 <창천-蒼天>이 이번 전시회의 테마가 되었습니다.

심 작가가 보여주는 인물조형과 소재에서, 그가 현재 인류가 봉착한 곤경과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조정무와의 대담에서 이러한 문제를 언급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심업의 예술에 대한 추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대담 내용에서 등장하는 키워드, 예컨대 저항, 주제, 추상주의와 형식주의 예술에 대한 비판 등은 그가 오랜 시간 동안 고찰해오던 문제이며, 한국예술계의 현주소에 대한 그의 인식, 혹은 불만과 관련이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그의 작품은 동서문화의 상이한 가치관의 충돌을 반영합니다. 그의 작품이 겨누고 있는 문제는 시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석유문제, 오염문제, 전쟁 문제, 특히 슈퍼자본주의 국가인 미국과 기타 국가 간의 관계문제 등을 들 수 있겠죠. 그 의 작품은 분명 깊은 우환의식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심업의 작품 토론회를 여는 것은 예술작품의 주제와 표현 방법상 그의 작품이 갖는 의의에 대해 여러 비평가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그에게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측면에서 더 진일보할 수 있는지 말이죠. 우리는 중국예술 비평가로서, 물론 중국의 각도, 중국예술의 각도에서 한국 예술가의 작품, 그리고 현재 우리 인류가 공통으로 직면해 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가져 봅시다. 바꾸어 말하면, 심업 작가는 한국인이지만 그가 다루는 문제는 세계적, 국제적이며, 시사성을 띠고 있습니다.

예술적 표현의 경향으로 볼 때 심업의 예술은 현실비판주의와 상징주의의 결합을 특징으로 합니다. 저는 그의 이러한 표현 방식을 매우 좋아하고, 나아가 친밀감을 느낍니다. 현재 중국 조각계의 주류는 팝조각이기 때문입니다. 심 선생의 작품이 중국 조각계에 시사하는 바가 있고, 또한 특별한 가치를 가지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특별히 이번 전시회의 기획자를 자청하였고, 본 토론회를 마련하였습니다. 제 글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이에 근거하여 평론을 쓰려 합니다.
우선 오늘의 주인공인 심업 선생님께 그의 창작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청해 듣기로 하죠.

심업
산업혁명과 기술혁명이 가져온 과도한 개발과 발전으로, 인류는 물질 과잉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식 가치관이 각 지역과 인류의 발전에 끼치는 영향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인류의 생존 환경은 이미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저는 인류의 운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에, 이러한 위협과 인류의 고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미술계는 형식화, 상업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의 작품은 비교적 강렬한 비판성을 띠고 있고, 이러한 작품은 한국에서 성적 타부 등 제약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국 미술계가 매우 다양하고 대중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곳에서 작품을 발표할 수 있게 되어 마음이 편안하고 기쁩니다.

인 솽시
저는 심 선생의 작품이 일종의 강렬한 비판정신과 뚜렷한 현대주의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정, 그리고 세심한 관찰과 가차없는 비판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의 경제발전, 그리고 한국 국민의 민족정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대여섯 번 다녀온 적이 있고, 한국에서 아주 가치 있는 전시들을 관람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광주의 저항시대에 수많은 예술가가 참여하여 창작한 포스터나 판화, 잡지 등을 보았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당시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투쟁, 그리고 혁명에 대한 한민족의 열정,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었고, 개성이 매우 강했습니다. 유사한 일들이 중국에서 발생했다면 중국인들은 대부분 참고 넘어갔을 터인데, 한국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칼 맑스는, 경찰력의 수준이 높다는 것은 그 나라의 저항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한민족은 강렬한 민족적 자존심을 가지고 있고, 이는 우리를 감복시킵니다. 하지만, 이러한 투쟁정신은 동양철학에서 숭상하는 “음을 품고 양을 지킨다(抱陰守陽)”, “특별히 하고자 하는 것이 없으면 곧 강한 것이다(無欲則鋼)”등의 관념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저는 한국 조각가 박창환씨의 평론을 쓴 적이 있습니다. 쥬창(酒厂)에 있는 뱌오(表) 화랑에서 그의 전시가 있었는데, 그의 대학시절에 제작된 초기작품들도 인간의 고통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현재 인간의 변화무쌍하고 표류하는 상태를 표현하는 방향으로 전향하였습니다. 그 역시 철鐵의 정취와 색채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죠. 재작년 겨울 저는 영국에 가서 유명한 조각가 게무레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도 이러한 인물조각상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물상은 실제로 철로 주물한 것들이었습니다. 수백 개, 아니 천에 달하는 조각상을 만들어 도시의 구석구석에 전시해 두었더군요. 길을 걷다가 백화점 쇼윈도우에서 갑자기 철로 된 조각상이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볼지도 모릅니다. 어디를 가나 모퉁이마다 조각상이 있을지도 모르죠. 그의 철로 된 조각상은 도시의 어디에나 있습니다. 산비탈이나 해안선도 예외가 아니죠. 게무레를 비롯해서 사양에서는 많은 현대예술가들이 여전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나, 심지어 인간의 몸 자체를 오브제로 활용하여 인류의 생존 현실과 저항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심업 선생의 작품도 그들과 유사성이 있고, 현대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그의 사상은 깊이가 있으며 모종의 본질성, 혹은 궁극적 이상과 가치를 강조합니다. 그는 그러한 긍극적 이상과 가치관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자신을 지키고 이러한 이상을 선양하고자 합니다. 반면에 중국 현대예술가들은 시각적 감수성, 순간의 쾌감 등을 강조합니다. 심업의 작품은 사상, 반성, 비판성을 강조하고, 이는 분명 중국 현대예술과 맞지 않습니다. 중국예술가들은 대체로 개인의 느낌, 개인의 순간적 생활체험에 관심을 갖습니다. 따라서 중국 현대예술은 사소하고 파편화되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거시적이고 통일적으로 예술을 해석할 역량도, 관심도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심 선생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비판정신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도 여전히 계승해야 할 모더니즘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버마스는 모더니즘이 아직도 많은 부분 완성되지 못하였고, 아직도 많은 것들을 지속적으로 반성하고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론회에 앞서 위딩교수와 잠깐 한담을 나누다가 미국의 SF영화와 미래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영화에서 사이버 인간, 혹은 미래의 로보트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과 충돌하며, 지배와 반反 지배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만들고, 무성생식을 하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이 역으로 인간을 지배합니다. 저는 아직 생물진화의 각도에서 이러한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생물 변이의 문제는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심 선생의 작품에서 보면, 자유여신에서 아래의 인간들까지 모두 하나의 탯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심 선생이 여전히 인간의 사회적 상호 연결과 시대적 연속성이라는 개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위 딩
인솽시의 얘기를 제가 이어 볼까요? 영화얘기가 나왔는데, 저는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마치 영화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의 제작현장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화《레지던트 이블》은 3편까지 나와 있는데요, 제가 그 영화를 좋아해서 각 편당 두세 번씩은 봤습니다. 이 영화는 “좀비영화” 인데요, 좀비와 관련된 소재는 사실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합니다. 흡혈귀라든가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죠. 이러한 소재를 다룬 작품에서, 좀비는 인간의 또다른 존재형식, 즉 인간이 사후에 수많은 불행을 겪은 이후의 물리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사실 그것은 물리적 상태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 상태이기도 하죠. 왜 많은 사람들이 《레지던트 이블》을 좋아할까요? 그것은 이 영화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 점이 제가 심 작가의 전시에서 찾아낸 《레지던트 이블》과의 관련성입니다. 《레지던트 이블》은 복제인간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유전자 전이를 통해 계속해서 인간을 복제합니다. 영화에서는 아름다운 여성을 만들어 각종 테스트를 받게 하죠. 테스트의 일환으로 그녀는 통로를 지나가다가, 총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녀를 만든 사람은 그녀의 사체를 버리고, 그녀의 완벽한 유전자를 이용해 더 업그레이드된 복제인간을 만듭니다. 이는 실제로 더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류의 이상이죠. 도태된 사람들은 쓰레기로 버려지거나 좀비로 남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이러한 좀비들은 가장 저급의 존재이며, 그들은 버려지거나 사살된 복제인간의 몸을 먹습니다.
이 영화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된 미녀 복제인간은 결국 인간의 자의식을 갖게 되고,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본질을 찾는 과정에서, 결국 자신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복제공장을 장악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전자 모델에 따라 자신을 대량 생산하여, 인류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해 획일화된 이상 상태인 것이지요. 전 세계는 가장 우수한 유전자구조를 가진 “그녀들”에 의해 장악되고 자연에서 진화되어 온 인간은 저등 동물로 전락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풍부한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전시에서 모든 작품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작품 자체의 형상과 언어를 통해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실 작품이 전달하는 의미는 예술가가 뭐라고 말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전달하는 시각적 인상에 있습니다. 시각적 인상 이면에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 이 작품들은 모두 굳어버린 시체들로 보입니다. 조형 근육이 모두 오그라들어 있기 때문이죠. 근육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말라 있고 오그라들어 있습니다. 모두 미이라 상태의 물건들입니다. 이는 실제로 무엇이겠습니까? 실제로 인간이 엄청난 재난에 직면했을 때의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 안에는 언어의 패러독스가 담겨 있습니다. 전시장 중심에 있는 저 힘 겨루는 두 남자의 조각상을 예로 들어 볼까요? 등 부분의 근육을 자세히 살펴 봅시다. 조형적 측면에서 보면, 등 근육은 당연히 팽팽하고 힘이 있어야겠죠. 다리 근육도 힘이 있어야 하고요. 하지만 작품에서 전달되는 이미지는 연약하고, 무력합니다. 겉으로는 힘있어 보이고, 반항하며 대항하는 듯하지만, 신체의 각 부위는 모두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저 벽에 걸려 있는, 소리치는 듯 우는 듯한 조각을 포함해서, 모두 로댕의 “지옥의 문”이나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심판”과 유사합니다. 그러면 로댕과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로댕의 조각은 작품의 근육이 장력張力이 있고, 그의 조각언어는 매우 힘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것들을 통해 상승단계에 있는 인간의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 작가의 작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인간 생명력의 괴멸입니다. 이는 예술적 언어를 통해 본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각가가 조각언어를 사용할 때 유형화된 경향을 띤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만의 언어가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작품에서 인물의 팔이 길게 늘어져 있는데, 심 작가의 모든 작품에서 이런 특징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근육질의 조직구조를 포함해서, 이는 모두 심 작가의 고의적인, 혹은 유형화된 표현입니다. 이러한 측면은 모더니즘적인 것이 아닙니다. 모더니즘은 개성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심 작가가 현대적(當代) 혹은 포스트모던적이지만, 완전히 포스트모던에 속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아직 생각이 명료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느낌을 본 토론회에 문제로 제기하겠습니다. 토론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면, 소재와 언어 사이의 충돌입니다. 작가 본인의 사고방식에서 접근하자면, 그는 현재 서양 공업문명 이래의 인류 문명의 발전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보기에 미국문화는 곧 공업문명을 대표하며, 이것이 바로 그가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패러독스가 있습니다. 작가가 사용하는 표현언어와 방식이 공업문명의 그것이며, 미국식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제가 심업 작가에서 묻고 싶은 문제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헐리우드식, 즉 공업생산양식에서 출현한 헐리우드의 방식입니다. 왜냐 하면 할리우드식은 미이라와 같기 때문입니다. 미이라는 모두가 똑같이 생겼고, 생간이 가능하며 복제도 가능합니다. 모두가 헐리우드식입니다. 때문에 저는 심 작가가 미국식 방식으로 미국을 비판하고 있고, 그가 사용하는 언어와 표현하려는 내용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우 웨진
앞에서 솽시 박사는 예술가가 저항하는 방식은 동양적 사유가 아니라 미국적 사유, 혹은 서양적 사유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위 딩
저항이 무력한 것은 동양적 사유가 생각이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입니다.

저우 웨진
심업 작품의 주제와 표현 기법 간에 모순이 있다는 말씀이시죠. 두 분의 발언은 한 편으로는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 보여주고, 다른 한 편으로는 심업 예술의 내재적 모순 혹은 패러독스를 보여줍니다. 제가 보기에 이는 현대 모든 동양인들이 동서관계 문제를 사고할 때 직면하게 되는 패러독스이지, 심업 작가 개인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이라”논법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위 딩
인간은 오그라들어 미이라가 되면 똑같습니다. 모든 미이라들은 똑같습니다. 미이라가 아닐 때 개성적 특징들이 나타나는 것이죠.

가오 링
저는 아직까지 폴리코트로 이렇게 처리한 작품을 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엔 금속으로 만든 것인 줄 알았습니다. 작품 표면에 녹이 슬어 있으니까요. 그는 인간의 몸을 녹 슨 표면처럼 처리함으로써 침해받고 상처받은 인간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조형언어에서 인간의 사지를 길게 늘어뜨려 변형시키는 것은 어떤 이질적인 느낌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작품이 어떠한 빛깔과 광택도 없이 완전히 녹슨 색깔을 띠고 있는데, 이 역시 철학개념상 일종의 이질적인 것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또한 심 작가의 작품에서 강렬한 서술성과 상징성을 보게 됩니다. 인과관계가 매우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죠. 그의 작품에는 미국달러, 미국국기, 자유의 여신 등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최종적으로 연상시키는 것은 인류 자본주의 공업문명의 수많은 부산품들입니다. 작품《생산》에서 여성의 음부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은 모두 코카콜라캔이나 산산조각이 난 사지四肢인데, 모두 이러한 쓰레기와 부정적인 면을 표현하려 한 것이죠. 또한 권총은 일종의 폭력에 관한 은유입니다. 심업 작가는 강렬한 현실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고 사회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느낄 수 있었죠. 심 작가를 한국인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중국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심 작가가 중국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작업하고 있는 환톄예술구(环铁艺术区)와 숴쟈촌(索家村)은 모두 오늘날 중국의 혼잡한 문화현실을 보여주는 곳이고, 이러한 특징이 이 한국예술가의 작품경향에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한국의 문제는 중국에 비해 단순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심 작가가 경험했던 20여 년 전 한국의 상황과 비슷할 수 있겠지요.
현재 북경은 거대한 실험장입니다. 작가는 작업실을 베이징으로 옮겼을 때 베이징이 모순과 활력을 동시에 안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고, 이러한 상황이 그가 언제나 학창시절의 강렬한 현실감각을 유지하는 데 적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위딩 선생이 제기하셨듯이, 저항의 대상과 저항의 수단 사이에는 분명 일종의 인과관계가 있습니다. 방금 사전에 준비된 대담 내용을 읽어보았는데, 심 선생은 동양의 문화를 인정하고 있고, 아시아 문화에서 말하는 “인내” 역시 이에 포함됩니다. “인내”는 분명 동양문화에서 중요한 개념입니다. 즉 충돌과 대항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인내와 양보를 강조함으로써 서로 다른 사람 간의 차이와 오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동양문화의 정수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정수가 어떻게 작품에 체현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전자는 자신의 생각은 나타내지 않고 문제만 제기하는 방법입니다. 후자는 자신이 내면에서 추구하는 목표를 작품에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후자의 방법이 좀더 좋지 않을까요?

지금 심 선생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현실 속에서 인류가 직면한 보편적인 문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에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은 한국보다 발전이 뒤처졌으니까요. 중국은 30년 간의 짧은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문명의 충격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고 있으므로, 중국의 문제는 더욱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술작업을 하든 예술비평을 하든 간에 어떻게 자신의 내면이 추구하는 것을 드러낼 것인가, 어떻게 조형언어 또는 시각언어로 드러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 좋지 않겠습니까? 강렬한 비판성은 예술가에게 매우 중요한 측면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새롭게 드러내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동양문명, 동양문화가 서양문화의 합리적인 부분을 흡수하고 포용하면서 새로운 문화형태를 창조한다면, 이것이 좀 더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얘기는 일단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저우 웨진
실제로 우리가 인내에 대해 얘기할 때,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미덕이고 다양한 의견을 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죠. 그렇다면 부정적인 면은 무엇일까요? 바로 연약함입니다. 따라서 “인내”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율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또한 이것은 저항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선생님께서 심 작가의 조형언어에 대해 간접적으로 의견을 제시하셨는데요, 저항의 측면에서 조형적 힘이 부족하다는 뜻입니까? 다시 말해 근육을 형상화할 때 더 힘있게 표현하여 저항적 측면을 두드러지게 해야 더 좋은 시각적 효과를 낼 수 있고, 위딩 교수가 얘기한 것처럼 미이라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겠다는 것이 가오링 선생님의 견해입니다. 심 작가가 작품을 녹이 슨 것처럼 만든 이유는 이렇게 해야 힘이 있고, 시간성과 역사의 깊이가 드러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저희도 청동을 사용하려고 했었는데, 그것은 너무 고전적이고, 그다지 현대적인 느낌이 덜한 것 같았습니다.

위 딩
힘을 표현하는 것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로댕처럼 각 신체조직에 장력이 있게 표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처럼 왜소한 사람을 가늘고 길게 표현하는 것인데, 이 역시 장력이 드러납니다.

저우 웨진
자코메티는 주로 표현주의 기법에 입각하여 정신성을 강조했고, 분명 힘이 있어 보입니다. 이것은 조형의 각도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쟈 팡저우
저는 우선 작품의 테마를 “창천蒼天”보다는 “창생蒼生”으로 하는 것이 더욱 접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시가 저에게 준 느낌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심 작가의 작품이 드러내는 것은 푸른 하늘 아래의 민중, 민중들의 생존 현실, 민중이 맞닥뜨리는 재난의 현장입니다. 왜 위딩 교수가 그의 작품을 미이라에 비유했을까요? 작품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마치 발굴된 유물 같아 보입니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응고되어 있고, 철과 같은 질감을 드러내도록 만든 표면에는 녹까지 슬어 있으니까요. 녹은 시간 개념을 함축하며, 이를 통해 몸부림치는 상태를 영구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지진이나 큰 재난으로 매몰된 사람들이 수년이 지난 후 발굴되었을 때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상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 작가의 조형물들이 제게 주는 느낌이 바로 이렇습니다. 이러한 몸부림치는 상태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위딩 교수의 해설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근육질을 강조하지 않고 왜소하며 가늘고 길게 표현하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체력이나 체능은 현재 인간의 생존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 인류의 생존 방식은 힘도 아니요, 저항도 아니요, 대항도 아닙니다. 몸부림치려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심 작가가 소재를 발굴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이 점은 배울 만하고, 우리 중국 예술가들도 거울로 삼을 만합니다. 그는 전인류의 각도에서 우리 인류의 생존과 우리가 봉착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인류가 직면한 재난은 모두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자연입니다. 이는 항거할 수 없는 천재天災입니다. 근래에 발생한 원촨(汶川) 대지진이 증명하듯이, 우리 인간은 자연 앞에서 갈수록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며, 이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둘째, 테러리즘입니다. 전 인류에 대한 테러리즘의 위협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올림픽 개최를 예로 들어볼까요? 올림픽은 전인류가 모두 관심을 갖고 기다리는 성대한 체육대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지금부터 지하철까지도 안전검사를 실시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까요? 테러리즘의 발생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테러리즘이 우리에게 드리우는 그늘이 극심하기 때문이죠.“9.11”사태는 미국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제2의 재난입니다. 다시 되돌아와서 얘길 해보죠.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테러의 위협을 받았다는 것이 동정이 가긴 하지만, 역으로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미국이야말로 가장 큰 테러국가입니다. 저는 봉황위성 채널에서 상영 중인 “소실된 유고슬라비아”라는 기록영화를 보았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사건을 회고하는 프로그램이죠. 1편에서는 중국 대사관이 피격당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 우리 대사관 주위엔 군사적 표적이 될 만한 아무런 건물이나 시설이 없었습니다. 미국이 조준했던 것은 바로 중국 대사관이며, 이는 인류 외교사에서 미증유의 일입니다. 이것이 테러리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사관 폭발현장은 정리되지 않고 아수라장같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대사관은 폭발된 상태 그대로이며, 당시의 중국 대사관저는 현재 떠돌이들이 사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만약 미국과 같은 국제경찰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입장에 서 있다면 저는 미국을 옹호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많은 지역이 보호해줄 “경찰”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찰”이 자국의 이익에 근거하여 행위한다면 이는 불공정한 것이며, 인류에 대한 위협이 될 것입니다. 경찰국가는 자신들이 침략하고 싶은 나라를 침략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문제죠.

저는 이 예술가의 작품이 겨누고 있는 문제가 아주 명확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자유의 여신상, 미국의 국기와 유사한 이미지, 미국달러 등의 코드는 모두 분명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위협, 인류의 생존이 맞닥뜨리고 있는 위협이란 바로 오만방자한 대국이라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일률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 역시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예컨대, 빌 게이츠는 580억 달러나 되는 거금을 자선기금으로 사회에 헌납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자본주의란 무엇이고 사유제란 무엇인가? “사유재산”을 헌납하여 공익사업을 벌이는 것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유제가 아닙니다. “裸捐(나연)”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후손에게는 조금도 남기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류사회의 발전이 오늘날에 이르면서 발생한 새로운 경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발전이 극에 달하여, 부富가 어떤 사람의 수중에 극도로 집중되고, 그 “어떤 사람”이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현재로서는 이러한 일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구상했던 공산주의에는 없는 부분입니다. 개인이 자신의 지혜를 발휘하여 대량으로 사회의 부를 집중시킨 후 역으로 사회에 공헌합니다. 금방 모순에 대해 얘기했는데, 저는 개개인 모두 모순적인 존재이고 사회 역시 모순적인 존재이며, 전세계와 인류 역시 모순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측면에서 다른 분분을 부정하거나 또는 긍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모순은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죠. 때문에 나는 이 한국인 예술가가 인류의 문제를 거시적으로 다루고, 인류의 생존환경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인류가 직면한 세 번째 재난의 근원은 새로운 문명이 만들어낸 재난입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 배기가스,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등이죠. 전 미국 부통령인 앨고어가 출연한 다큐멘터리(그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대량의 데이터를 사용하여 우리 인류의 신문명이 야기한 재난이 인류에게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며, 이는 인류 스스로 초래한 재난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새로운 문명이란 바로 지구자원의 무절제한 사용과 낭비이며, 이는 인류가 자초한 재난입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그 후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가 심업의 인류에 대한 자기반성은 중요하며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그의 작품은 실제로 인류가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성이 선행될 때 인류는 비로소 진보할 수 있고, 이전의 발전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묻어둔 수많은 잠재적인 위험과 재난의 결과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좀더 빨리 이러한 측면을 개선할 수 있다면, 우리 인류의 생존 환경 역시 개선될 것입니다.

저우 웨진
심 작가는 자신의 작품의 주제를 ‘저항’이라 보고 있습니다. 반면 쟈팡저우 선생은 작품에서 ‘인간의 몸부림’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이는 주제와 충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의 작품을 ‘인간의 몸부림’으로 읽는다면, ‘저항’은 심 작가의 태도로 변환될 것입니다. 즉 심 작가의 태도가 저항으로 변환되는 것입니다.

쟈 팡저우
저 작품은 또 다른 공간에서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다리 하나가 벽에 묻혀 있는데, 마치 또 다른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느낌입니다. 몸부림과 탈출의 이미지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 생명이 최후를 맞이할 적에 내뿜는 절박한 호흡, 생존에 대한 필사적인 의지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위 딩
몸부림과 저항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미묘한 차이는 존재합니다. 조각언어의 각도에서 ‘저항’은 일종의 힘을 의미합니다. ‘몸부림’ 역시 힘을 의미하지요. 그러나 ‘몸부림’의 경우 좀더 연약한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적절합니다. 따라서 힘이 부족한 경우라면 ‘몸부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겠죠.‘저항’으로 해석한다면 조금 억지스러워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저는 방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몸부림을 예술가 자신의 저항으로 변환시키는 입장으로 바뀌신 듯한데, 예술가의 작품과 그의 입장은 일치하는 것입니다. 작품이 당초 예상했던 효과에 미치지 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양자는 일치해야 합니다. ‘몸부림’을 주제로 하는 작품, 예컨대 고대 그리스의 《라오콘》은 ‘몸부림’에 속합니다. 뱀이 그들 부자를 감아 옥죄는 순간 그들은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이는 힘있는 몸부림이며,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그의 표현언어를 완벽하게 결합시켰습니다. 만일 예술가가 표현한 것은 반항인데, 감상자에게는 무기력해 보인다면, 작가는 더욱 강력한 방식을 다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작가가 반항을 표현하려 했든 몸부림을 표현하려 했든,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예술 자체가 우리에게 전달하려 한 것은 반항의 무기력 혹은 몸부림의 무기력이며, 이는 무능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입니다. 이에 작가의 작품은 또 다른 해석을 드러내게 됩니다. 즉 작품 자체의 해석인 것이죠. 작품 자체는 작가의 언어적 해설 혹은 의지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저우 웨진
우리들 사이에 여러 가지 해석방식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다만, 심업 선생은 줄곧 강력한 저항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작품의 효과와 작가의 이상 사이에 약간의 거리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쟈 팡저우
작품마다 이미지들이 다르게 구체화됩니다. 머리를 박는 저 작품은 대항을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대항은 서로를 소모시키는 과정입니다. 두 사람의 머리가 모두 손상되어 있습니다.

저우 웨진
저 총에 박힌 사람들을 묘사한 작품은 제목이 《영웅들》입니다. 미군병사는 《아메리칸 카우보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노인을 묘사한 《보험제도하에서 생명의 의미》입니다. 모든 작품들이 미국문화와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현대 사회제도와의 연관성을 드러낸 작품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험제도는 사람들의 수명을 될수록 연장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지만, 보험회사나 사회기구는 이를 통해 이윤을 얻지요. 인간의 생명이 돈벌이의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생명은 본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입니다. 어떤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저항이나 몸부림을 표현하고 있지만, 자기만의 고유한 의미를 드러내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위 딩
여러분들께서 작품의 소재에 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심 작가는 중국예술가들과 달리 개인적인 정감이나 느낌에서 출발하지 않고, 보편적인 관심에서 작품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 인류의 공통가치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류 공통의 가치란 ‘보편적 원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술영역에도 이런 보편적인 표준 혹은 가치관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특히 현대예술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됩니다: 현재의 다원화되고 혼란스런 상황에서 보편적 가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예술에 어떻게 체현되며, 무엇을 전달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바로 이번 전시회가 의미를 갖는 지점입니다.

양 웨이
앞서 저항적 요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는 심 선생의 작품이 저항적 성격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도를 달리해서 생각해 봅시다. 예컨대 현대예술에서는 비교적 색깔이 선명하고 표면이 매끄럽게 처리된 작품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미 현대예술의 주도적 경향이 되었지요. 그러나 심 선생의 작품은 완전히 상반됩니다. 이러한 차이 자체가 이미 저항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분명 의도적인 것이겠지만, 그는 어째서 얼룩으로 표면을 처리하거나 녹이 슨 질감을 사용했을까요? 조형이 모두 길게 늘어져 있고, 전형적인 모더니즘의 장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모든 기법들이 작가의 조형의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정서적 반응으로서 강렬한 저항성이 심 선생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저항인일까요? 작가는 작품 안에서 선명하게 자신의 태도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바로 미국문화를 대표로 하여 형성된 물질문화를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의 모순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저항에 대해서 심 선생은 더욱 효과적인 방식을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몸부림’으로 전환을 한 것입니다. 심 선생은 자신의 글에서 동양문화의 인내심과 같은 요소를 논했습니다만, 그가 작품은 그러한 측면을 전달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큰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동양의 인내심을 어떠한 언어를 통해서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좀전에 위딩 선생은 심 작가의 작품이 여전히 미국식 비판방식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 역시 대체로 그런 견해에 찬성합니다. 어떻게 보면, 현대 예술의 비판방식은 미국식이 가장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저 참기만 한다면, 대체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여 이러한 인내 방식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며, 오늘날의 시공간에 대해 어느 정도 반성케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심 선생의 작품 안에서 다음과 같은 모순을 발견하였습니다. 정서와 관련해서, 그의 작품이 전달하는 비애감은 사실 동양문화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문화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서는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한 명의 예술가로서, 만일 자기의 정서를 예술적 언어로 전화시키고자 할 때, 과거에 그가 향유한 문화적 배경이나 철학적 배경이 어떤 부분에서 어느 정도 작용하는가 하는 점이 관건이 됩니다. 이것은 중국예술가와 한국예술가가 직면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당면한 문제입니다.
아시아의 경우, 비록 급속한 발전과 지속적인 경제성장 등을 구가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다수의 규범들이나 문화자원들은 사실 서구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이러한 현재의 상황은 필연적으로 아시아인들로 하여금 서양문화에 대한 저항심리 혹은 반항심리를 유발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반항할 때, 우리는 어떤 무기들을 동원하고 있습니까? 핵무기나 총기, 아니면 서양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물건들로 그들에게 저항할 것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모순입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주치(朱其)는 자신의 글에서 자본주의의 돈을 가지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욕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서양자본주의의 내부에 속해 있는 지식인의 반성입니다. 우리는 동아시아 지역의 지식인 혹은 예술인으로서 현대물질문명을 반성할 때, 제3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는 없을까요?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즉 계속해서 서양의 방식으로 서양에 반대한다면, 우리의 이러한 반성은 아마도 서양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성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위 딩
자기의 창으로 자기의 방패를 찌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요. 그러나 방법을 바꾸어 버린다면 아무런 방법도 남지 않게 됩니다.

양 웨이
이는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의 예술가는 물론, 심지어 전체 동아시아의 예술가들 모두 이러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따라서 심 선생의 작품은 이러한 곤경을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동양문명의 곤경이라 할 수 있겠지요. 때문에 그는 저항하고, 몸부림치며, 고함을 지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바로 서양적인 것들입니다.

위 딩
미국에 대항하는 방식이 바로 그렇지요. 당신이 핵무기를 갖고 있고, 상대방도 핵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상대방은 당신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침 당신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긴 해도, 바로 그렇게 당신은 상대방을 길을 답습하게 되는 것이지요.

덩 핑샹
개인적인 취향이랄까, 저는 대체로 이 작품을 좋아합니다. 주제의 측면에서, 그리고 언어의 측면에서 말이지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 의미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의미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현대예술을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현재의 유행을 주도하는 예술가들은 의미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해체적 의미가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지금은 의미의 재구축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해체해 나간다면 커다란 문제에 봉착할 것입니다. 허무주의로 빠져버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허무주의는 일정 조건 하에서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주장이지요.
무엇보다 저는 그의 작품이 주제나 모티브 측면에서 인간영혼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죠. 인류의 고난이나 인류의 중대한 문제 등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방금 여러분들께서 반항에 대해 논의하셨는데, 저는 심 작가의 반항이 명백히 두 가지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봅니다.

첫째, 인간의 이질화에 대한 반항입니다. 그는 모순된 기호들을 선택하여 반항의 대상이나 반항의 상징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문화와 패권에 대한 반항입니다. 그는 미국의 문화적 상징기호들을 선택하여 저항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저항이야말로 인류가 당면한 중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후진국들은 동시에 이 두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를 예로 들 수 있겠는데, 욕망이 팽창하면서 각 개인들은 모두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와 관련해서 중국인들이 미국인들에 비해 더 혹독한 결과를 겪게 될 것입니다. 중국인이 처한 조건과 미국인이 처한 조건은 엄연히 다르니까요. 미국인은 체계적으로 문예부흥이나 계몽운동을 거쳤으므로, 물질에 대한 반항이라는 측면에서 그들 나름의 문화적인 역량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국인들은 문예부흥이나 온전한 의미에서의 계몽운동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동일한 처지이죠. 우리 아시아인들은 물질만능주의에 대항할 충분한 역랑은 물론 뚜렷한 대상조차 갖고 있지 못합니다. 만약 물질만능주의가 패권주의와 결탁한다면 더욱 막대한 힘을 휘두르게 됩니다. 때문에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인류에 관해서나 세계적 의미에서나 모두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매우 적극적인 주제입니다. 따라서 가치있고 의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들 안에는 또한 폭력의 모티브가 담겨 있습니다. 저는 5.18 당시 심 작가가 지향했던 것이 폭력에 대한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작가가 폭력에 반항하는 동시에 폭력에 대한 반항을 강조할 때, 그 경계선은 선명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명하지 않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데, 저는 두 사람의 몸에 적용된 두 가지 기호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두 종류의 총기입니다. 하나는 AK47인데 그것은 총구가 몸에서 밖으로 향해 있습니다. AK47가 무엇이던가요? 소련을 위시로 하여 중동 및 현제의 테러리스트들이 주로 사용하는 총기류입니다. 상징적 기호를 담고 있는 무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M16입니다. 미국인들의 자동소총인데 밖에서 몸을 향해 박혀 있습니다. 작가는 분명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처리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죠? 작가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심업
그것은 패권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들은 미약하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저항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덩 핑샹
작가의 답변에서 강렬한 반패권, 반폭력 의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층차는 반폭력적인 동시에 반패권적입니다. 이 부분은 비교적 명확한 편입니다. 전체적인 저의 느낌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비관주의적 정신을 작가에게서 엿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비관주의적 정신은 적극적인 면모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반항이 적극적인 의미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항의 최종적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작가가 뚜렷한 결론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끝까지 비관주의를 유지합니다. 물론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그가 단순함에 빠지지 않고 깊이를 지니는 것이겠지요.
어떤 비관주의적 철학자는 인간의 악한 욕망이 인류문명의 진정한 동력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우리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때로 비관주의적 정서를 느끼게 됩니다. 선량한 사람이 종종 악한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데, 이는 비관주의의 한 예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전반적으로 인류는 반드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예로 근래 읽은 글의 내용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문예부흥 이후 또는 고대의 사람들과 현대인들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더 선량할 것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 작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고대인이 더욱 선량하며, 현대인은 더욱 악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개체적 인간을 놓고 볼 때, 예를 들어 공맹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을 때의 중국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훨씬 선량할 것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더욱 복잡하고 또 악한 존재입니다. 욕망도 고대인들에 비해 훨씬 많죠.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진보가 있는 것일까요? 법률, 오락, 제도, 관념 등이 진보했습니다. 그러나 개체적 인간을 놓고 보면, 인심이 예전만 못하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현대문명은 더욱 많은 향략을 제공해 주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욕망을 확장시킵니다. 이것은 하나의 패러독스입니다. 심 작가의 조각은 우리에게 많은 숙고의 여지를 남겨줍니다. 저는 그의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비관주의를 띠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정확하게 비관주의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최후까지 적극적입니다. 간단히 저의 감상을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본체언어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작가께서 1980년대 유럽에서 흥기한 해체주의, 그리고 모더니즘에 대한 반박의 성격을 지닌 신역사주의 미학에 대해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언어와 주제 면에서, 또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감수성 면에서 작가가 당시 유행한 이들 신역사주의 미학에 근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면에서나 내면적 정신의 측면에서 서로 부합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그가 선택한 언어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심 작가의 언어가 계몽주의 이후에 형성된 유럽의 조각언어를 참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견해로는, 선택의 적절성 면에서 판단한다면, 이러한 언어사용은 작가의 인문적 주장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해결책이었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는 비교적 합당한 언어를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조각언어 자체에 대한 그의 열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감수성도 갖추고 있죠. 이러한 열정과 감수성이 조각방면에서의 재능과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저우 웨진
덩핑샹 선생은 작품 속의 반항에는 여러 가지 함의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고 계십시다. 하나의 각도가 아닌 중층적인 각도에서 말이지요. 이제 최진석 선생의 말씀을 듣도록 하지요.

최 진석
예술에 관한 토론회는 이번에 처음입니다. 저는 철학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로서 조각에 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저 제가 느낀 바를 간단히 얘기 합시다.
여러분들이 작품의 주제를 논의할 때 작가가 제기한 저항이라는 개념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저항이 단지 공업문명에 대한 저항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항은 인간의 삶의 표현형식이고 인간의 생존을 위한 모든 과정은 저항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바깥세상으로 태어나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개체가 자아의 본질을 바깥으로 밀고 나아가는 모든 과정 속에 저항의 개념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생존에 대한 갈망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인류가 건강하게 생존해 나갈 수 있는 방식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반드시 저항적 태도를 고수하라 그래야만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절망도 있고 희망에 대해 표현한 것도 있습니다. 방금 쟈팡저우선생이 얘기 했듯이 만약 그가 저항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도 희망적인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꼭 비관주의자인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지요. 제국주의와 수퍼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 -- 심업은 그것을 욕망과 폭력의 근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심업은 그것에 대한 저항을 분명히하고 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은 그의 작품 속에서 녹이 쓸고 또 부식되고 있습니다. 저항은 승리를 보장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한걸음 크게 진척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저우 웨진
생명 자체가 곧 저항이고, 저항은 보편성을 띤다는 말씀이십니다. 물론 그러한 저항은 현재 대상을 가지고 있는 저항에도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 솽시
과거에 우리가 페미니즘을 논할 때, 사실 페미니즘에도 몇 가지 반항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백인여성의 남성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변부에 위치한 흑인여성이 백인여성으로부터 억압을 받고, 그로 인해 그들이 백인여성과 모든 남성들에 대해서 전개하는 저항입니다. 이번 전시회가 만약 공업자본이 가져온 인간의 이질화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자본주의 국가, 심지어 미국 역시 똑같이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가나 제3세계국가의 입장에서는, 즉 우리처럼 선진국들의 압박을 받는 국가 입장에서는 사실 두 가지 서로 다른 상황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 작가의 작품에서는 이 두 가지 경우가 하나로 혼합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우 웨진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미국문화를 대표로 하는 서양문화에 대한 반항을 표현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서양이 공통으로 공업문명의 타락을 겪고 있다는 얘기겠지요. 동양뿐 아니라 서양 자신도 역시 공업문명이 가져온 물질만능주의에 저항해야 합니다.

인 솽시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내면의 마음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그의 표현들이 개인적인 압박감으로부터가 아니라 인류의 고통으로부터 야기되는 외침임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작품을 보고 나면, 그의 작품들이 단순히 어떠한 기구의 상업적 목적을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죠. 오늘날 중국에서는 왜 국제자본이 밀려 들어오자 미술의 비판성이 순식간에 와해되고, 상업적 취향에 맞추려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일까요? 물론 예술의 비판적 풍모를 견지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슨 이유로 쥬창(酒厂), 798예술구 등에서 시장영합적이고 자본영합적인 얼굴과 욕망들이 득실거리는 것입니까?

저우 웨진
심업 선생은 대담에서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기했습니다. 즉, 자신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죠. 왜 그것들에 반대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에서 형식주의는 대중들이 이해못하는 예술이 되었으며, 대중들은 과연 이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술가, 화랑, 평론가들이 가담한 상업적 조작이 일종의 결탁과 음모를 낳는데, 그 목적은 모더니즘과 추상주의를 시장화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대중들은 이해 못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이들 전문가들에게 의지해 끌려다니는 것이지요. 그는 자신의 예술이 반反 상업적이고, 반反 모더니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더니즘이 한국에서 상업화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는 중국의 현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중국의 모더니즘은 대중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고, 추상주의 역시 규모 있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현대예술을 포함해서,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예술이 비교적 건실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인 솽시
이것은 비교적 대답하기 쉬운 문제입니다. 한국의 예술발전은 서양예술발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시스템은 서양과의 연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삼성미술관에 가 보면, 미국 현대미술 대가들의 원작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시스템 전체가 완벽한 것이죠. 중국 모더니즘 계통은 미술대학에서조차 교육의 기초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시장기초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국의 구식 기업가나 벼락부자들은 모더니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알 수 없는 물건이 자신들을 흔들고 있다고 느낄 것이며, 이를 위해 돈을 쓰지는 않습니다. 단지 아카데믹한 사실주의 예술과 세속적인 팝아트에만 돈을 씁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해할 수 있고, 설령 나를 속이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만일 똑같이 속았다고 느끼더라도 그것이 추상적인 방식에 의한 것이라면, 이들의 마음은 놓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우 웨진
이는 중국미술의 상업화 경향과 한국미술의 상업화 경향이 상반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인 솽시
이 문제를 구분해서 봅시다. 심업 선생이 구상적, 사실적 방법을 채용했다고 해서, 한국의 현대예술이 전반적으로 그러한 방법을 채택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장치들 안에도 현대에 대한 인식과 견해가 담겨 있고, 심지어 비판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 대학에서조차 사실주의(寫實主義)나 이른바 위(僞) 전위적 사실주의 또는 팝아트 등이 극도로 상업화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저는 현재 중국의 현대예술이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지금이 과도기였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의 과도기 상황을 되도록 빨리 넘어섰으면 합니다. 예술가와 평론가들도 점차 현재의 상황이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무분별한 환호성을 지르지 않는다면, 시장의 돈은 나날이 건전해질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죠. 저는 근래 《뒤늦은 추격》이란 글을 썼습니다. 저는 현재 미술시장이 꽁무니, 즉 전위예술의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위예술은 80년대에 줄곧 악전고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투기꾼들은 당시 어디에 있었습니까? 알 수 없지요. 그들은 그 시기에 어째서 전위적인 모더니즘을 지지하지 않은 것입니까? 전위와 모더니즘 예술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기다렸다가 이제 와서 꽁무니나 뒤쫓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 시장에서 전위예술의 가격이 상승하자 그제서야 뒤쫓고 있는 것이죠. 전위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서 말입니다.

쟈 팡저우
현재 시장에는 두 가지 가격평가 시스템이 있습니다. 하나는 학계에서 통용되는 시스템입니다. 작품이나 예술가를 평가할 때 시장의 동향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작품 자체의 가치에 근거해서 평가하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판매순위에 따라 등수를 매기는 것입니다. 그 작가가 몇 장의 그림을 팔았고, 또 가장 비싸게 팔린 그림은 무엇인지, 벌어들인 총액은 누가 가장 많은지를 따져서 그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이죠.

저우 웨진
저는 오늘 토론회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제껏 심업 작가에 대한 저의 이해가 너무 단순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매우 다채롭고 또 풍부한 해석들을 주고 받았습니다. 작품이 일단 예술가의 손을 떠나면 이미 작가 개인의 제어 범위를 초월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작품은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에 우리는 각기 다양한 각도에서 작품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이죠. 참석해 주신 토론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모두 감사합니다.